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윌리엄 1세 (문단 편집) === 유년기 === 윌리엄은 1028년 [[노르망디]] 공작인 '''악마공''' 로베르 1세(Robert I) ^^(1000년 ~ 1035년)^^와 평민 출신 내연녀 에를르바(Herleva of Falaise) ^^(1003년 ~ 1050년)^^ 사이에서 태어났다.[* 기록에는 에를르바가 길에서 춤을 추던 모습을 우연히 목도한 로베르 1세가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서는 에를르바가 빨래를 하느라 맨다리를 드러낸 모습에 로베르 1세가 한눈에 반했다고도 한다.][* 국내에 번역된 『정복왕 윌리엄』이라는 책에 따르면 그가 태어났을 시기는 1027년 말 혹은 1028년 초일 것이라 한다.] 하지만 정식 혼인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았기에 [[사생아]]였고, 따라서 '''사생아왕'''[* 영어로는 William the bastard라고 하는데, bastard는 현대 [[영어권]]에서 '''호로새끼''' 정도 어감이다. 현대에 [[사생아]]가 나올 일이 거의 없어서 욕설로 굳어졌을 뿐 그 전까지는 사생아, 혼종이라는 의미로 널리 쓰였다. 물론 [[그리스도교]]는 사생아를 나쁘게 보았으므로 좋은 뜻이 아님은 분명하다. 현대 영어에서 혼외자녀를 지칭한다면 보통 love child 라고 하며, bastard는 역사적인 언급이 아니면 거의 쓰지 않는다.]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일부 전설에 따르면 태어날 때 산파가 막 태어난 갓난 아이를 짚을 깔아놓은 바닥에 누이자마자 아기가 손으로 짚을 한 움큼 쥐었다고 한다. 어머니 에를르바는 출신마저 미천했고[* 에를르바의 아버지는 무두장이 팔레즈의 풀베르트(Fulbert of Falaise) ^^(976년 ~ ?)^^였다고 알려졌다. 무두장이는 유럽에서는 [[백정]]과 비슷한 불가촉천민에 가까운 최하급 계층이었다. 하지만 재단사 또는 장의사였다는 설도 있고 로베르 1세의 시종을 지냈다고도 한다. 다만 시종은 윌리엄이 태어남으로서 받은 직위였다는 추정도 있다. 이후 콩트빌의 에를루앵(Herluin de Conteville) ^^(1001년 ~ 1066년)^^과 혼인했고, 윌리엄의 [[이부형제]]이자 가신(家臣)으로서 잉글랜드 원정에 참여하는 바이외 [[주교]] 오도(Odo of Bayeux) ^^(1036년 ~ 1097년)^^와 모르탕 [[백작]] 로베르 등을 낳았다.] 기본적으로 사생아에게 매우 엄격했던 시대에 로베르 1세가 이런 사생아를 후계자로 삼은 이유는 그의 유일한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유년 시절 초기를 어머니 아를레트의 고향인 팔레즈에서 보냈고, 로베르 1세가 [[예루살렘]] 순례를 마치고 귀환하던 중 갑자기 병을 얻어 죽자 '''일곱 살'''에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다. 예루살렘 순례를 떠나기 전에 사생아 아들인 윌리엄을 후계자로 지정했던 덕분에 공작위를 계승받긴 했지만, 사생아라는 출신 때문에 끊임없이 견제하는 친척들과 맞서야 했다. 로베르는 생전 봉신들에게 윌리엄에게도 충성을 서약하게 했지만, 사후 친척들의 단순한 조롱에서 암살 시도까지 괴롭힘과 저항은 그치지 않았다. 언젠가는 대항전 중 성을 포위했을 때 성벽에 무두질한 가죽이 내걸렸는데, 그의 외가 혈통을 비웃는 의미였다. 그의 외조부가 무두장이이기 때문. 윌리엄은 그 성의 시민들 전부, 혹은 지도 계층의 시민 40명의 손을 자르는 것으로 응답했다. 윌리엄은 [[프랑스 왕국]]의 [[카페 왕조]] 제3대 국왕 [[앙리 1세]]와 로베르 [[대주교]] 등 아버지의 충신들 및 어머니와 그녀의 친척들, 에를르바의 외숙부형제인 왈테르(=[[월터]])의 보호와 헌신으로 초기의 위기를 극복했고, 이런 시련은 그에게 강한 의지력을 심어 주었다. 15세에 [[기사]]로 인정받은 뒤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